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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더/지리산 둘레길

<8일차>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지리산 둘레길-8일차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하룻밤을 묵었던 곳은 산청군 중태마을 송정근(76),이명엽(72) 부부가 운영하는 '엽잔수' 민박집이다. 사실 덕산읍내에서 많이 떨어진 이 민박집을 택한 이유는 특이한 이름 때문이었다. 왜 엽잔수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물어보았다. 할아버지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했다. 다만 나뭇잎(), (술잔), ()을 뜻하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풍유가 느껴지는 이름이다. 부부는 이 마을 토박이가 아니었다. 6년 전에 부산에서 살다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농사를 지을 생각이 없었으니 귀농인 아닌 귀촌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려는데 할머니께서 신문지로 돌돌 싼 것을 내밀었다. 9구간 종착지인 위태마을까지는 점심 먹을 곳이 없다며 도시락을 싸 주신 거였다. 안 그래도 출발하며 점심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진작 내 마음을 읽어셨나보다.

 

둘레길 가면서 먹으라고 사과를 챙겨주시는 중태마을 민혜야 할머니.

 

밤새 비가 많이 내렸지만 아침에는 말끔히 개었다. 위태마을까지는 큰 재를 하나 넘어야 했다. 하지만 도시락을 배낭에 넣고 가니 마음이 든든했다. 산에서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덕산 곶감 맛이 좋은 이유는 8할이 바람 때문인 것 같았다. 마을 모퉁이를 돌아 산길로 접어들려고 하는 순간 노부부가 경운기에 비료포대를 싣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힘겨워보였다. 배낭을 내려놓고 비료포대를 경운기에 대신 옮겨주었다. 할아버지는 고맙다며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라신다. 갈 길이 멀어서 그냥 가겠다고 했더니 오히려 서운해 하셨다. 중태마을 터줏대감인 최옥영(86), 민혜야(81) 부부다. 연세도 많으신데 여태 농사를 짓고 계시냐고 여쭸더니 할아버지는 대뜸 노래를 읊조리신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할아버지는 손짓과 인상을 써가며 참으로 노래도 참 잘 부르셨다. 그런 낙천적인 성격 때문에 건강하게 사시는 것 같았다.

 

결혼한지 64년째 되는 중태마을 최옥영, 민혜야 부부.

 

 

두 손을 꼭 잡으시는 노부부.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옛날 얘기를 늘어 놓는 최옥영 할아버지.

 

감나무 그늘에 앉아 할아버지의 얘기를 잠시 들었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부친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일본 오카야마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16살에 다시 돌아와 중태마을에 터를 잡았고, 당시 18살이던 지금의 할머니와 결혼해 64년째 살고 계신단다. 워낙 말씀을 재미있게 하셔서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인사를 드리고 출발 하려는 참이었는데 할머니께서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손에 사과를 하나 들고 나오신다. 시장할 때 먹으라며 챙겨주신 거였다. 생각치도 않게 중태마을에서 도시락에 사과까지 받고 나니 갑자기 부자가 되는 느낌이었다.

 

할머니가 집에 왜 들어가시나 했더니 내게 사과를 주실려고 했던거였다.

 

결국 해가 중천에 뜬 1240분에서야 중태마을을 벗어났다. 위태마을까지는 4시간 거리. 부지런히 걸어야했다. 하지만 김밥에 사과까지 배낭 속에 있으니 걱정할 게 없었다. 중태마을 벗어나 유점마을에 들어서니 소나기가 한차례 거세게 내렸다. 마을정자에 앉아 잠시 소나기를 피했다. 소나기를 뿌린 먹구름은 다행히 금세 걷혔다. 다시 파란 하늘이 들어났다. 넋 놓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나도 이곳에서는 저 구름처럼 잠시 왔다가 지나가는 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은 이 땅을 터전으로 삶을 이어가는 이곳의 사람들이다. 민박집 부부가 그랬고, 여든이 훨씬 넘은 연세에도 콩밭을 일구는 노부부가 그랬다. 그분들이야말로 지리산 자락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진정한 주인들이었다. 계곡과 마을을 지나며 살펴본 지리산둘레길은 먹구름이 지나간 뒤의 파란하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청군과 하동군의 경계인 갈치재를 넘으니 오후 2시 반이 넘었다. 여전히 위태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엽잔수 민박집 항아리 뒤로 보이는 감나무밭.

 

중태마을 감나무.

 

장착처럼 처마 밑에 쌓아둔 마른 대나무.

 

 

위태마을에는 유난히 대나무밭이 많았다.

 

9구간 종착지인 위태마을에는 오후 3시 반에 도착했다. 점심까지 든든히 먹은 덕분에 5km 정도 떨어진 궁항마을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큰 재를 하나 넘어야했지만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물통에 물이 떨어졌다는 것뿐이었다. 궁항마을로 가는 고개는 가팔랐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고개 정상에 도착해  할머니가 주신 사과로 수분을 보충했다. 사과 하나의 힘은 대단했다.

 

민박집 할머니가 싸주신 김치볶음말이 김밥.

 

갈증을 해소해준 할머니의 사과,

 

2평도 안되는 텃밭에 김을 메고 있는 하동군 궁항마을 손계진 할머니(81).

 

할머니는 밭을 메면서도 은가락지만은 꼭 끼고 계셨다.

 

 

오후 늦게 도착한 궁항마을 민박집.

 

 

이 그림이 참 그립다. 궁항마을 '궁항정'민박집은 폐교된 시골분교를 꾸며서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8일째 둘레길을 걸으면서도 늘 준비는 소홀했다. 중간 중간 뜻하지 않은 호의가 없었더라면 깊은 산속에서 당황스러운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궁항마을에 도착하니 민박집이 한 곳 뿐이었다. 다행히 방은 비어 있었다. 방2개와 거실이 딸린 황토로 지은 독채를 통째로 쓰는 호사도 누렸다. 저녁을 먹고 나니 다시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조용한 산골마을에 밤은 깊어 가고 개구리 울음소리만 적막을 깨고 요란스럽게 울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