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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더/비전향 장기수

새로나온 책 <바꿀수없는>

바꿀수없는

 

저자:정지윤

출판사:h2

 

 

 

 

1. Time Machine

인류가 전쟁을 끝내지 않는다면 전쟁이 인류를 끝낼 것이다라고 말했던 허버트 조지 웰스는 타임머신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문학작품의 소재로 등장시켰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떠나거나 시간을 초월하여 먼 미래로 여행하는 이 흥미로운 개념은 수많은 이야기꾼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웰스 이후로 수많은 작가들이 타임머신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그들의 소설과 영화, 또는 애니메이션으로 형상화시켰다. 어떤 주인공은 먼 미래를 여행한 후 현재로 돌아와 멋진 모험담을 뽐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주인공은 미래에 도착하지만 타임머신의 고장이나 분실로 인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을 맞기도 한다. 그것이 비극이거나 희극이거나 타임머신의 이야기는 언제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흥미로웠다.

그런데 애초부터 타임머신의 고장으로 인해 출발하기도 전에 타임머신 안에 갇힌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본적이 없다. 세상의 시간은 흘러가되 타임머신 안에 갇힌 주인공은 시간만은 흐르지 않는다면 희극일까, 비극일까? 그것은 희극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다. 2018년의 논픽션이다. 일제에 의한 식미지배 끝에 해방이 왔고, 전쟁이 있었다. 4.19가 있었고 5.18이 있었다. 민주화투쟁이 있었고 몇 번의 정권교체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긴 세월동안 고장 난 타임머신 안에 갇힌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육체는 감금되었으며 그들의 신념은 봉인되었다. 빈궁한 삶은 수십 년을 초월하여 정지되어 있다. 심지어는 두고 온 어린 자식들 또한 두 살이거나 네 살인 기억으로만 박제되어 있다. 이 책은 멈추어버린 시간을 찍은 사진이다.

 

2. Photograph

사진은 시간을 정지시킨다. 사진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단 한 순간만의 명암만을 포착한다. 사진의 빛과 어둠의 미학이다. 어디가 어둡고 어디가 밝은지 그리고 그 경계는 어디인지 사진은 말없이 보여준다. 이 책에 기록된 19명의 시간은 기자가 카메라에 담기 이전에 이미 정지되어 있었다. 이 사진들에는 콘트라스트가 없다. 주인공들의 인생에 명과 암이 없기 때문이다. 빛과 어두움 중에 그들 삶의 대부분이었을 어두움만이 트리밍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사진들에는 어떤 캡션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 책을 준비하는 동안에 김동수 선생이 돌아가셨다. 인천의 박종린, 광주의 서옥렬, 음성의 김동섭 선생은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 나주의 이두화 선생도 거동이 어려워 곧 요양원으로 갈 예정이다. 이분들은 모두 8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고령인 데다가 오랜 옥고와 전향공작 과정에서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과 암 투병에 시달리고 있어서 언제 세상을 등질지 알 수 없다.”(김혜순 민가협양심수후원회잔의 추천사 ) 그들의 삶과 정신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도 그들의 육체는 늙고 병들어 마지막을 가늠하기 힘든 순간을 맞고 있다. 우리의 역사와 양심이 이들을 아웃포커싱하는 동안 일어난 일이다.

 

3. Profile

처음 떠나온 길들은 모두가 달랐다. 인민군으로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거나 자진해서 또는 쫓겨서 입산하여 빨치산이 되었다. 또는 어린 아이들과 아내를 뒤로하고 당의 임무를 받고 남파되었다. 6~70년 전의 일이었다. 체포되어 평균 30여년에 이르는 감옥살이를 한 것부터는 같았다. 몇 줄로 요약할 수 없는 고문을 감내해야 했고 짐승의 시간과도 같은 전향공작반의 폭력을 피해갈 도리가 없었다. 대부분은 그 폭력과 고문을 이겨내지 못했다. 강제로 날인한 전향서를 인정하지 않고 전향무효를 선언했으나 감당했던 폭력과 고문은 병으로 장애로 몸에 남아 지워지지 않고 있다.

혁명가로, 전사로, 빨치산으로 살았던 빛나던 청춘은 짧았다. 몸이 감금당하고 머릿속의 생각을 바꿀 것을 강요받았던 감옥살이는 길었다. 그러나 출소 이후 연고 없는 땅에 이방인으로 살아온 시간은 더욱 길었다. 더 넓은 감옥으로 이감된 것이다. 몸은 감시당했고, 주거는 제한되었으며, 삶은 곤궁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젊은 시절의 신념을 바꾸지 않았고, 남은 삶을 통일운동에 보탰다. 몇 줄의 글로 요약될 수 없는 삶의 여정을 깊게 패인 주름살 골짜기마다 묻었다. 무엇보다도 피붙이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송환이라는 마지막 희망이 모두 같았다.

 

4. Unconvertible

류기진 선생은 인민군으로 참전하였다가 체포되었고 재판도 없이 11년의 옥살이를 하고 60년을 이방인으로 살았다. 93세인 선생은 북으로 돌아가 전역신고를 하고 싶어 한다. 이광근 선생은 공작원으로 남파되어 사형을 선고 받고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22년을 전향공작에 시달리다가 출소하였다. 김동섭 선생은 중국해방군으로 장개석 군대와 싸웠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으며 빨치산활동중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되었다. 문일승 선생은 출소 후에도 감시를 피해 다니느라 1차 송환이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김교영 선생은 어릴 적 고향집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생사를 알 수 없지만 이두화 선생의 오빠들이 생존해 있다면 아흔 일곱과 아흔 셋의 나이다. 서옥렬 선생이 길을 떠날 때 아들은 세 살과 다섯 살이었다. 허찬형 선생은 식민지 17, 인민군 3, 빨치산 3, 감옥살이15년 후에 51년을 이방인으로 살았다. 18살에 남로당 비밀당원이 된 양원진 선생은 늘 빨간색 옷에 한반도 배지를 가슴에 차고 다닌다. 최일헌 선생은 두 살배기 아들과 임신한 아들을 두고 남파되었다. 60년 전의 일이다. 남편을 따라 빨치산 전사가 되었던 박정덕 선생은 요양원에 있다. 오른쪽 다리가 없다. 박희성 선생은 16개월 된 아들을 두고 왔다. 그 아들이 올해 쉰 여덟이 된다. 박순자 선생은 아직도 빨치산 시절의 꿈을 꾼다. 오기태 선생이 북에 두고온 자식들 이름은 춘자, 정자, 성일이다. 막내는 이름을 짓지 못하고 내려왔다. 박종린 선생은 감옥에서 25년 출소해서 35년을 살았다.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한다. 거기에 딸과 사위, 손자와 손녀가 있다. 김영식 선생은 전향서를 쓰고도 27년을 복역했다. 2001년 고문에 의한 강제 전향은 무효이므로 이를 취소하는 양심선언을 했다. 강담 선생은 전립선암판정을 받았고 뇌졸중을 앓고 있다. 진통제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 양희철 선생은 10분간의 전향연설을 거부했다. 37년의 옥살이는 그 댓가였다. 이들의 모든 꿈이 이루어져 2차 송환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김동수 선생은 이제 돌아가지 못한다. 부산의 한 사찰에 안치된 유해만이 북의 아내와 딸에게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무엇이었을까? 그들을 그 긴 시간동안 고장 난 타임머신 안에 가두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바꿀 수 없었던 것은.

 

(글:이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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